이야기(거니야)

<경솔이-소침이>정직하진 못해도 비겁하진 말라니깐...그런데

거니빵 2016. 3. 23. 01:40

'경솔'이와 '소침'이가 요즘 핫한 명소로 떠오른 은행나무길이 있는 뱅구동에 놀러갔다. 버스에서 내려 은행나무길을 걷는데, 가을 석양과 어우러진 풍광이 장난이 아니었다. 다만, 꼬리꼬리한 은행 특유의 냄새가 정서적 풍요감을 방해했지만...아니 대단한 스멜에 이내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래도 조금 지나니 후각이 마비되면서 주변 모습이 다시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둘의 얼굴빛이 곧 어두워졌다. 핫한 곳이라고 해서 연예인도 많고, 멋지고 예쁜 일반인도 많을거란 기대를 했는데...가는 날이 장날인지 썰렁한 거리만이 둘을 반겼다. 자신들의 연애불운을 슬퍼하면서도...인증사진은 찍어야 했기에 동네를 한바퀴 돌아보고 있었다.
돌면서 보니 은행 특유의 꼬리꼬리한 냄새는 진동하는데...바닥에 떨어져 있을 법한 은행열매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엄청 깨끗했다. 동네사람들이 청소를 정말 열심히 하는게 틀림없어 보였다. 그래도 은행나무가 유명한 동네까지 와서 은행열매라도 기념으로 가져가려 했는데...아쉽다 생각이 들었다. 벽을 보니 <은행열매는 마을주민들의 소중한 재산이며, 귀한 곳에 사용하고 있으니 절대 가져가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라는 벽보가 붙어있는게 아닌가. 순종적인 '소침'은 그냥 가려는데, 개구장이 '경솔'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쉬워서...주변에서 긴 장대를 찾아왔다. 그리곤 예상대로 장대로 나뭇가지를 쳐서 열매를 떨궜다. 후두둑...너덧개가 떨어졌다. '소침'에겐 꼬리꼬리한 냄새가 나는 열매를 손질해 과육부분을 벗기라고 하고는 다시 장대를 들었다. '소침'은 발로 열심히 작업을 하는데, '경솔'은 왠일인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와~ 냄새 장난아닌걸~"그러곤 다시 나뭇가지를 치려는데...나이 지긋한 동네주민분이 다가와서는 "한국사람 아니에요? 벽에 붙여놓은 벽보 못 봤어요?"라고 물어보는게 아닌가. 창피하게스리. '소침'은 창피함에 이미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경솔'은 멋적어하며 "죄송함돠~ 제 친구가 온김에 열매라도 꼭 가져가고 싶다고 해서요. 정말 죄송함돠~"라며 불쌍한 표정을 짓는게 아닌가. '소침'이는 '이녀석이 또 이러네'하는 생각을 하며 얼굴을 쳐다보는데, 완벽한 표정연기에 이번에도 또 아무말 못하고 혈압만 올리고...동네주민은 애매해하는 표정을 짓다가는 "이미 딴건 어쩔 수 없으니 가져가시고, 더는 따지 마세요"하면서 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으니, '경솔'과 '소침'은 비닐봉지에 은행열매를 담고서는 자리를 떴다. 더 돌아볼 기분도 아니고 아니 '소침'은 '또 당했구나'싶어 짜증도 나고 해서 동네로 가려고 버스정류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미 어둠은 깔렸고, 배도 고팠지만...솔직히 '경솔'은 밥먹고 가려 했지만, '소침'의 기분이 말이 아니어서 빨리 동네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탔다. '소침'은 창피함과 배신감을 떨어내려고, 차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데...그런데...'소침'의 신발에서 퍼져나가는 은행열매의 스멜은 이내 버스 안을 가득 메웠다. 손님들의 표정은 서서히 굳어지면서 코를 막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창을 열면서 "IC~ 뭐야""누가 변봤어?""추운데 뭐야...창문 열게하구"등등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차 싶었다. '소침'의 머리속은 '그냥 내릴까? 아님 어떡하지?'하고 있는데, 갑자기 '경솔'이 입을 반쯤 가리면서 낮지만 버스안의 왠만한 사람들이 다 들릴 정도로 "야~ 아까 은행따지 말자고 했잖아. 그리고 손질한다구 난리 치더니...ㅉ"하는게 아닌가. 아차 싶었다. 또 당했구나 싶으면서 머리속이 하얘지면서 그냥 내리려고 했다. 그런데 '경솔'이 '소침'의 허벅지를 꾹 누르면서 "이왕 탔으니까 그냥 가자구." 그러더니 이내 일어나서는 "죄송함돠~ 곧 내리니깐 조금만 참아주세요. 정말 죄송함돠~" '소침'은 이젠 창피함을 넘어 허탈함을 느꼈다. 화도 나지 않았다. '이건 아니야' 하다가 '다 내탓이다'라는 생각에 까지 이르렀다. 내릴때까지 10분 남짓의 시간이 걸렸는데...멍한게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경솔'이 '소침'에게 인사를 하려 돌아보는데...이미 '소침'은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녀석. 삐쳤나? 미안하게스리. ㅉ...내일되면 괜찮아질거야'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갔다. '경솔'은 맛나게 저녁식사를 하고서 TV를 보다가 잠을 잤다. 그것도 아주 잘 잤다.

다음날 점심시간 즈음되서 '소침'에게 전화를 걸어보는데...전원이 꺼져있는게 아닌가. '괜찮을거야. 우리 우정이 몇년짜린데~'라 생각하며 오후에도 저녁에도 통화를 시도했고...전화기는 계속 꺼져있었다. 자취방에 가봐도 인기척이 없고. '바쁜 일이 있어서 어디 갔나보지~'라며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계속 연락을 시도했다. 그렇게 사일이 지났다. 낙천적이고 다른 사람 감정을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경솔'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경쓰이기 시작하더니 삼일이 지나면서는 걱정에 잠까지 설쳤다. 사일만에 통화가 되자마자 뛸듯이 기뻐하며 '소침'집 앞으로 뛰어갔다. 몇일 못 본 애인 만나러 가듯이 정말 빨리도 뛰었다. 그래놓고는 감정을 들키기 싫어서 별일아니듯한 표정으로 "어디 멀리 갔었냐? 전화는 켜고 있지~ 잘 갔다왔냐?" 묻는데, 예전과는 다르게 '소침'이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신경써야 될거 같아" 뜬금없는 말에 '경솔'이 "뭔 소리야" 라 물으니, '소침'이 "그냥 그렇다고. 피곤한데 쉬어야겠는데, 나중에 통화하자"라고 돌아서며 '내가 너한테 정직해야한다고 말하는게 아니야. 존중을 바란 것도 아니고 최소한 비겁하진 말라고...그런데...이젠 힘들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날 '소침'은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다. 둘이 알고지낸지 십오년만에 처음으로 다른 동네에서 살게되었다. 그리고...


나도 '경솔'처럼 좋은 친구가 등돌리게 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나...한번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