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그리고 전화기
생각해보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도 아니니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24~5년전 무선호출기(일명 삐삐)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친구를 만나는 방법은 두가지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나는 그 사람의 생활 동선을 파악하고 있다가, 지금 어디쯤에 있다 생각하는 곳(집, 학교, 직장 등)으로 무작정 찾아간다. 만약에 그곳에 없으면..........말고^^
다른 하나는 사전에 약속을 정해 만난다. 그런 경우 대부분 전화 통화를 했다. (전화기가 보편화 되기 전에는 편지로 했다는...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이 시절에 갑자기 피치 못할 일이 생겨서 약속장소에 나가지 못하게 되면 약속장소로 전화를 걸어서 양해를 구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114의 전화번호 검색정보가 유용했었었던) 지금 생각해보면 불편했지만, 그래도 뭔가 모를 아련함으로 기분좋게 기억할 수 있는 시절이었던 것 같다.
이후 무선호출기의 출현으로 외부에 있으면서도 약속을 만들 수 있는 획기적인 시대가 도래한다. 곳곳에 공중전화기가 있었고, 좀 논다는 동네의 공중전화기들 앞에는 여지없이 엄청난 길이로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통화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 음성을 확인하고 남기는 일들을 했다.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불편함은 있었다. 한번은 친구와 레스토랑(지금은 보기 힘들지만 예전에는 많았다는 전설의 요식업소)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구조가 'ㄴ'자 형태로 상당히 큰 곳이었다. 먼저 가서 기다리다가 잠시 화장실 간 사이 친구가 들어와서는 서로가 먼 곳에 자리잡았었다. 그러곤 서로 안온다고 기다리다가 1시간여 후에 공중전화 앞에서 상봉했었던 슬프고 어이없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어느날 휴대전화가 나타나더니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이제는 기다릴 필요없이 원하면 언제든지 공간 시간적 제약을 극복하고 사람들과 약속을 만들어 만나는 세상이 되었다. 필요에 따라서 장소며 시간 등을 언제라도 변경할 수 있어 최고의 편함을 준다. 정말정말 멋진 세상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전화기를 통해서건 다른 것을 통해서건 공간 이동이 실현되는 날도 오겠지?!!!
그런데 가끔씩은 지금보다 예전이 좋았었다는 생각을 한다.
전화기만 있었던 시절에는 불편은 했지만, 그만큼 약속 하나하나를 소중히 생각했었다. 연애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애틋함이,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간절함이 담겨있는 약속들. 약속 하나를 만들기 위해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었는지.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약속 때문에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고 마침내 약속장소에서 시간이 다 되어갈 즈음 심장이 터질 것 같던 느낌. 지금 생각해도 귀에서 열이 나는 것이 기분좋은 흥분을 준다.
그리고 즉시성이 없어서 불편했다기 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내가 마음먹은 지금 결과가 없다고 해서 짜증낼 이유도 없었고, 기다리면서 느낀 설렘을 즐기기까지 했었다. 여유로움이 그립다.
세상이 문명의 이기들로 편해지면서 아쉬운 점들도 있는데...사람들이 약속에 대해서 그다지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 듯이 느껴지는 때이다. 언제라도 약속을 만들 수 있고, 변경할 수 있고...만나지 못하면 통화도 귀찮으니 톡으로 종일 연결되어 있던지 SNS를 통해 상대의 동향을 꿰뚫고 있을 수 있다고 그래서 감정적 연결이 지속된다고 생각해서 그런가보다. 물론 연결은 되어있을 수 있지만...그것이 감성적이고 정서적인 연결인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현재 상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고 또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지만...보여주고 싶고 알려주고 싶은 것만을 알고 있다면 그 상태를 상대와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연결이 되어있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판단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갑자기 책상위의 전화기를 보다가 생각이 너무 멀리 갔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얻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대신 잃는 것이 정말 소중한 것일 수 있다는 것도 잊지 않았으면.